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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설

[책] 살인자의 기억법(김영하) / 고통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살인자의 기억법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7-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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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노인이자 은퇴한(?) 연쇄 살인범. 그의 마을에 새로운 연쇄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알게 된 그는 딸을 지키기 위해 기억을 잃기 전 마지막 살인을 계획한다.

 

 

어두침침한 소재다. 왜 이 책을 집었는진 몰라도 조금이라도 잔인하거나 거북한 장면이 나오면 덮으려고 했다. 그런데 태생적으로 비장함을 거부하는 듯 한 이 70세 할아버지가 사람을 죽이고도 죽을 병에 걸리고도 대수롭지 않은 양 차가운 농을 던진다. 노인과 유머, 사람을 무장해제 시키기에 충분한 조합이다.    

 

혹자는 반전이 있다고도 하지만 이 책에 반전은 없다. 애초에 치매 걸린 노인의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한 넋두리를 읽고 있었으니 그게 사실이던 아니던 놀라울 것이 없다. 정작 나를 당황스럽게 한 것은 불교경전인 <반야심경>으로 마무리 되는 마지막 장을 읽으며 이 책이 결코 '재미'를 추구하는 소설이 아님을 알았을 때이다. 

 

몰아치듯 궁금증을 한껏 불러 일으켜놓고 이 무슨 철학적 결말인가. 허탈함을 느끼다가 놓치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아. 진작에 알아 차렸어야 했다. 처음부터 철저히 제정신이 아닌 주인공의 시점을 따라왔으니 끝까지 읽어본들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있을리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기억은 왜곡되고 사실과는 점점 더 거리가 먼 혼란속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살인사건이 아니라 그 생각마저 끊어진 고통스럽고 초라한 인간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책 표지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힌트를 주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 초월적인 힘은 상대가 살인자임을 개의치 않고 자신조차 믿을 수 없다는 두려움에 오줌을 지리는 늙은이를 만들어냈다. 어쨌든 기대했던 이야기는 아니었다. 

 

 

-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 p44

 

-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 p42

 

-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우연히'라는 말을 믿지 않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p63

 

-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든다. p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