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지만 어딘가 지질한 27세 백수 남자 이민수. 그는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지적 탐구를 좋아하는 지성인이다. 비록 고아로 태어났으나, 과거 배우였던 할머니 밑에서 크게 부족함 없이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다. 어느날 빈털터리가 되어 고시원으로 쫒겨나기 전까지는.
낙관을 유지하는 데에도 최소한의 공간은 필요했다. 그러니까 감옥 같은 독방에는 낙관보다는 비관이 어울린다는 뜻이다. 자기도 모르게 우울한 생각에 사로잡혀서는 아무 일도 하고 싶어지지 않는 생활이 계속되는 것이다. p.61
고시원에서도 당장 돈을 못내 쫒겨 날 판이지만 이 안일한 남자는 '설마 내쫓겠어?'라며 대책이 없다. 자신과 다시 잘해보려는 예전 여자친구 앞에서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다가 한 마지막 말은 "계산 좀..." 이었다.
"나는 말이야, 아직 철이 덜 들었나봐. 나는 좀,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야 되나. 그냥 좀 무의미한 일을 하고 싶어. … 사람들은 대부분 의미 있는 일들을 하잖아. 돈을 벌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 인생에는 그런 것보다 더 높은 차원의 뭔가가 있는 것 같아."
"내가 오빠를 잘못 생각했었나봐. 오빠는 아무래도 안 되겠어. 뭐랄까, 뼛속 깊이 게으름이 배어 있다고나 할까. 오빠는 이러니저러니 멋진 말로 포장하려 하지만 실은 그냥 놀고 싶은 거야. 세상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서 유유자적하며 살려는 거지. 안그래? p.77
이런 한심한 그를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주변에 흔히 보이는 여느 청춘의 모습이다. 물론 직장을 찾아 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자신에게 일절 질문을 하지 않은 면접관에게 조언을 구하니 이런 말을 한다.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지요. 그런데 그게 언제나 가장 중요하단 말이에요. 집에 가서 내 말을 잘 생각해봐요. 사회는 그런거예요. 여자라서 밀리고 나이가 많아서 잘리고 가난해서 대학을 못 가고 한국인이라서 차별받고, 그런거에요. 그걸 인정해야, 그래야 길이 보일거예요. 배경도 재능의 일부예요." p.199
그에게 지금 단 하나의 위안이 되는 것은 인터넷 채팅 퀴즈방이다. 현실과 단절된 익명의 퀴즈방에서 그는 자존감을 찾고 사랑도 한다. 그러다 거리로 내몰리는 지경에 이르고, 퀴즈를 통해 알게 된 어떤 이로부터의 꺼림칙한 제의를 받아들인다. 퀴즈만 풀면 큰 돈을 주겠다는 제안. 그때부터 이야기는 미스터리물로 전환된다. 그가 들어간 곳은 '회사'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 곳이 정말 존재했던 것인지 환상인지는 알 수 없다.
"세상 어디에도 도망갈 곳은 없다는 거. 인간은 변하지 않고 문제는 반복되고 세상은 똑같다는 거야. 거긴 정말 이상한 곳이었는데, 처음에만 그랬을 뿐, 적응하고 나니 하나도 다른 게 없었어." p. 445
그는 도망쳐 나온 후에도 남몰래 그 곳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찾았다.
아무런 배경도 보지 않고 재능만으로 자신을 선택했던 곳, 좋아하는 일만 하면 되는 곳, 몇 개월동안 퀴즈만 풀었을 뿐인데 안락한 잠자리와 식사는 물론 대기업 연봉을 주었던 곳, 그 돈을 도둑맞고 죽을뻔한 위기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쳐온 곳,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는 곳. 그 '회사'로 향하는 문을.
|
'책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슬픔이여 안녕(프랑수아즈 사강)/Good-bye가 아닌 Hello (0) | 2020.01.16 |
---|---|
[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김영하) (0) | 2019.11.08 |
[책]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히가시노 게이고) (0) | 2018.11.29 |
[책] 고양이 1,2 (베르나르 베르베르) (0) | 2018.11.11 |
[책] 채식주의자(한강) (0) | 2016.06.13 |